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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른이 되면 선생님을 기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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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클립스 레벨
2024-09-10 22:39 574 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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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른이 되면 선생님을 기를 거야." 별안간 떨어진 다부진 선언에 입술 끝이 저릿거렸다. 나름 잔뼈 굵은 몸이라고 생각해 왔던지라, 이젠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지도 않으리라 자신하고 있었건만. 아무래도 그건 자신이 아니라, 내 알량한 자만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선생님을 기르다니?"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네며,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자 유달리 긴 속눈썹 아래에서도 선연한 존재감을 발하는 흑요석 같은 눈망울이 물끄러미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혹시 또 친구들이랑 새로운 놀이라도 만들어온 거니? 선생님도 놀아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지금은 메이드 분들이랑 긴밀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중에····." 나긋나긋한 어투로 사정을 설명하자, 그녀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특유의 인형 같은 외견 덕분에 다소는 귀엽게 느껴지긴 했으나, 내용물이 내용물이다 보니 그런 경거망동한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먼 옛날. 대륙의 절반을 불바다로 만들었다고 일컬어지던 흑룡 킬바스의 직계 자손. 흑룡 킬라우에이아. 비록 지금은 작은 소녀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 핏줄에 암약하고 있는 흉악함의 크기는 거대한 활화산과 견주어도 까마득하게 느껴질 수준이었다. "또 다른 여자 이야기····." 섬칫! 처연히 읊조려진 말과 함께 삽시간에 뒤바뀐 주변 공기. 지금 당장이라도 목뼈를 부러뜨릴 것만 같은 검질긴 살의에 일순간 등골이 선득해졌다. "미, 미안해. 킬라. 선생님이 잘못했어. 킬라는 단둘이 있을 때, 다른 사람 이야기하는 거 싫어한다고 했었지." "으응····." 황급히 머리를 쓰다듬어 화재 진화에 나섰다. 아직 이 일에 익숙하지 않았을 무렵에는 이런 순간이 닥칠 때마다, 불붙은 폭발물 위에 손을 얹고 있는 듯한 긴장감에 시달리곤 했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금은 기절하지 않을 정도의 평정심은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선생님. 나 안아줘····." "그러면 드레스에 주름이 지잖니." "안아." "아하하····." 곧이어 떨어진 거절할 수 없는 부탁에는 너털한 웃음만 새어 나왔다. 흔히들 여자의 눈물이야말로 남자의 약점이라고들 하지만, 압도적인 힘이 있다면 구태여 약점을 공략할 필요조차 없다는 걸, 요근래 들어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영차." 짧은 기합과 함께 몸을 번쩍 안아 들자, 킬라의 얼굴이 쏜살같이 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꽈악. 혹여나 놓칠세라 내 목을 꽉 끌어안는 팔 힘으로부턴, 그악스러운 집착마저 느껴졌다. 어쩌다가 이런 응석받이로 자라버리고 만 건지. 알이었던 시절부터 신줏단지 모시듯 오냐오냐 돌봐온 내게도 어느 정도 책임은 있을지 모르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처음 보는 생판 타인에게 자신의 하나뿐인 자식을 팽개치고 간 부모 쪽이 훨씬 더 죄질이 무거웠다.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이다? 아직 놀이 시간도 아닌데, 킬라만 안아줬다는 걸 알면, 다들 선생님을 가만 안 놔둘 거야." "응····." 영혼없는 대답이지만, 지금은 대답이 되돌아왔단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꽈아악. "킬라야. 꼬리····." 허리를 휘감아오는 압박감의 정체는 구태여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감정이 고조될 때 신체 일부분이 용으로 되돌아가는 건, 아직 폴리모프가 서툰 새끼 용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증상이었다. 킬라는 또래 아이들 중에서도 폴리모프가 상당히 뛰어난 축에 속했지만, 감정을 다스리는 법이 워낙 서투른 탓에 좋아하는 스킨십을 할 때마다 매번 이런 곤욕을 치뤄야만 했다. "선생님. 좋아. 너무 좋아. 세상에서 제일 좋아." "킬라야. 볼 부딜 때는 비늘은 집어넣어야지. 선생님 아파····." 촤악! 이쯤 하면 만족했겠지 싶어 몇 차례 떼어놓으려고 해봤으나, 꼬리뿐만 아니라 날개까지 쫙 펼쳐진 모양새를 보니, 당분간 탈출은 어림도 없어 보였다. "나 원 참····." 털썩.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잠시 먼 산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선 누구 하나 붙잡고 해가 질 때까지 신세 한탄이라도 늘어놓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 모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초래한 재앙이었으니까. ◈◈◈ 자고로 용이란 육아와는 거리가 먼 족속들이다. 자식이 자립할 때까지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여타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용은 단순히 둥지에 알을 낳기만 할 뿐, 그 이후의 생존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러는 편이 훨씬 더 강한 자손을 남기기 용이하기에. 허울 좋게 말하면 양육강식. 허물없이 말하면 약자도태. 덕분에 용들의 세계에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부모 이름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도 허다하다고들 한다. 용은 고독 위를 나는 존재. 옛 현자들이 이런 격언을 괜히 남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 어디 가나 예외가 존재하듯, 그런 용들의 사회에서도 별종은 있었으니. 요 몇 년 사이 내가 만난 이들이 바로 그러한 별종들이었다. "소문은 익히 들었다. 금화를 주면 성년기가 될 때까지 새끼를 돌봐준다지? 이 몸의 고귀한 친족을 미천한 네놈에게 친히 하사해 줄 테니, 영광으로 알도록." 어디서 어떤 소문을 듣고 왔는지는 몰라도 오해입니다. 돌아가 주세요. 내게 이런 말을 할 용기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원래라면 억만금을 줘도 거절했을 제안이었지만, 상대가 집채만 한 용쯤 되니, 그러기가 참 쉽지 않았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문이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대지 위에 내리는 눈처럼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참극이 바로 지금 내가 맞닥뜨린 현실이었다. 드래곤 유치원. 내 거처가 몇몇 음유시인들에 의해 그런 이름으로 회자되고 있단 걸 처음 알게 됐던 날, 황망한 눈으로 반나절 동안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봤던 걸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그런 선택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또다시 짙은 후회가 가슴에 사무쳤다. "선생님. 울어?" 선생님 우는 거 아니야. 티 안 나게 오열하는 거야. 요근래 부쩍 눈물이 늘었다. 언젠가 본 책에서 보호자가 우는 건 아이들한테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했었지 아마. 앞으로는 주의해야겠다. "킬라 때문에 많이 아팠어? 미안해····." "아니야. 킬라 때문에 그런 게 아니야. 선생님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마렴." 드믈게 울상인 킬라를 토닥토닥 등을 쓸어주며 달래줬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는 여전히 쓰라렸지만, 적어도 아이들 앞에서만큼은 내색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왔다. 아이들에게는 죄가 없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부모를 잘못 만난 것 정도가 죄라면 죄이리라. 하지만 그런 치졸한 이유로 애먼 데 화풀이하는 비루한 인간만큼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생활이 내게 불이익만 불러일으킨 것만은 또 아니었다. 왕족의 성채 못지않은 거대한 대저택. 끼니마다 나오는 온갖 산해진미. 무수한 사용인들. 모두 용들이 가져다준 막대한 금화가 아니었다면, 구경조차 하지 못했을 부귀영화들이었다. 물론 구할 수 있는 일손이 중증 용박이들 밖에 없다는 게 약간의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그 점은 사정상 어쩔 수가 없었다. "킬나. 선생님 이젠 진짜 가봐야될 것 같은데. 슬슬 놔주지 않을래?" "우응····." "제발. 선생님이 이렇게 부탁할게." "····." 뾰로통한 입술은 요지부동이었지만, 얌전히 들어간 날개와 꼬리는 마지못한 긍정의 사인이었다.    "일 끝나면, 이따가 또 놀아줄게. 킬나는 착한 아이니까.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줄 수 있지?" "으···. 으응····. " 울먹이는 킬나를 어르고 달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건한 꼬리와 날개로 한참 동안 온몸을 꽁꽁 동여매져 있던 탓일까. 찰나의 홀가분함이 지나가자, 미칠듯한 뻐근함이 이내 관절 마디마디를 들쑤셔 댔다. 보호자로서 아이가 잘 따라주는 건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지만, 매일 같이 이런 고초를 겪게 되니, 솔직히 말해서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고마워. 킬라." 하지만 이러한 나날이 막막하다거나, 절망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아직 아이들에게는 비밀이지만, 머지않은 미래 용들간의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이러한 보모 노릇도 그 즉시 끝나게 되기 때문이었다. 내게 예언을 일러준 고대용의 말에 따른다면, 길어봤자 앞으로 1~2년. 후련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뭐라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기분이었지만. 오만불손한 용들에게 숱하게 휘둘려온 험난한 나날 덕분인지, 의외로 그러한 미래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만 걱정인 건,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하게 될 아이들 쪽이었다. '울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내가 밤에 물 마시러 잠시 침소를 비운 것만으로도. 브레스 섞인 울음으로 저택을 불태우기 일쑤인 게 우리 애들인데. 그런 내가 아예 사라져 버린다고 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 잠깐 상상해 본 것만으로 두 눈이 깜깜해지는 미래에 머리가 아득해졌지만, 잠깐뿐이었다. 어차피 미래에 일어날 일은 미래의 나의 몫. 생각해 봤자 마음만 갉아먹는다. 분명 어떻게든 되겠지. 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난 머지않아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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